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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대회

2017 설악 그란폰도 후기 1편


2017 설악 그란폰도.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수천명의 사람들과 함께 출발점에 서 있었다.

“아.. 도망치고 싶다..”

 

 

그리고 완주.....

10시간 39분, 504등, 남녀 통산 상위 38%.

 

 

 

 

 

총 길이 208km에 획득고도 4000m의 설악 그란폰도 코스. 당연히 이런 극악무도한 코스를 탈 생각으로 대회 접수를 한건 아니었다.

 

거리와 획득고도가 이것의 반 밖에 안되는 메디오폰도 코스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난처럼 시작한 주변 사람들의 부추김에 어느샌가 고민이 시작되었다. 내가 진짜 완주 할 수 있을까?

 

 

나는 업힐을 잘 타는 편이 아니다. 근육량도 평균에서 한참 미달이고 그렇다고 클라이머 체형의 깡마른 몸도 아니다. 대구에서 자전거 타는 사람들의 공인 구간이라 말할 수 있는 헐티재 기록은 42분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란폰도 코스라니..!

 

 

작년부터 장거리 라이딩 대회인 랜도너스에 자주 참가하고 있다. 올해는 좀 더 본격적으로 참여해서 슈퍼 랜도너가 되는 것을 노리고 있다.

 

사실 그란폰도 코스를 가고자 했던 이유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은, 설악 그란폰도 이후에 있을 대구 400K와 대구 600K를 대비하기 위함이였다.

200Km 무서워서 못타면 400Km, 600Km은 어떻게 타지?

 

 

하지만 이 코스는 보통 브레베 200K 코스보다 획고도 2배 이상 높고 제한 시간은 1시간 반이나 짧다.

 

게다가 브레베에서 주로 팩 라이딩을 하면서 같이 타는 오빠들의 기록을 갉아 먹는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대회에서까지 그렇게 챙겨달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솔로 라이딩을 각오해야했다.

 

 

 

걱정이 될수록 경험자의 말을 들어보아야한다. 대회 3일전에서야 그란폰도 코스를 가기로 확정 짓고 후기를 닥치는대로 읽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실전에서 제일 도움이 많았던 팁을 꼽아보자면

 

1. 물통은 무조건 2개 챙길것(이를 무시하고 1개만 가져갔다가 폭염주의보에서 더위 먹어 죽을뻔 했다)

2. 현금을 꼭 챙기고 코스 근처의 주유소와 슈퍼를 활용할 것.

3. 조침령 가기 전에 오버하지 말것.

4. 구룡령 리버스에 오르기 전에 물 보급을 충분히 할것.

 

 

그리고 개인적으로 염두에 두고 갔던 점들은

 

1.절대 초반에 오버페이스하지 말것

2.업힐에서 절대 무리하지 말것

3.왠만하면 보급소들 사이 무정차로 가고 104Km 스페셜 보급에서만 적당히 쉬어주기

4.챙겨간 보급품 부지런히 섭취할것

5.대략적인 타임 테이블로 시간 유추하면서 가기

 

사실 이것들은 장거리 라이딩을 주로 하는 랜도너들에겐 익숙한 사항인데, 그만큼 장거리 경험이 이번 그란폰도 코스 완주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정신을 차렸을땐 이미 나 빼고 다 굇수인것만 사람들에 둘러쌓여 출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지금이라도 메디오를 가야하나 고민을 하려는 찰나 폭죽이 터졌고 사람들은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출발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쫓아갈 팩을 찾는 것이다. 미천한 실력에 힘을 아끼려면 남들 피를 빠는 팩라이딩을 전략적으로 해야한다. 다행히 출발을 기다릴때 옆에 서 계신 한 커플의 뒤꽁무니를 쫓아간다. 아무래도 같은 여자라서  쫓아가는데 큰 무리가 없는 속도였다.

 

몇개의 낙타등을 넘고 업힐이라고 할만한 첫 언덕, 살둔재가 나왔다. 정신 없이 가다보니 뒤쫓아가던 언니가 안 보인다. 잠시 기다려볼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대회에서 그런 사치를 부릴 새가 없었다. 다른 팩을 찾자라고 생각하며 먼저 다운힐을 시작한다.

 

 

거기서부터는 적당한 팩을 찾기 위한 사투를 벌였다. 어떤 팩은 쫓아가다 느려서 버리고, 또 다른 팩은 너무 빨라서 버려지고를 반복했다.

 

따라가면서 등번호를 외워서 나중에 후기 쓸때 감사하다고 해야지 라고 생각했지만 하도 많은 사람을 따라가다보니 번호를 외울 정신머리는 없어져버렸다ㅋㅋㅋ..

 

 

구룡령은 다행히 경사도가 세지 않아서 기어를 다 털고 천천히 올라갔다. 200Km를 넘게 타야하는데 첫 업힐부터 무리할 필요 없었다. 아마 거기서 수백명이 나를 제끼고 갔겠지.

 

꽤나 긴 구룡령을 오르면서 갈증이 무척이나 심해졌다. 목이 엄청 말랐는데 업힐 중간에 물이 다 떨어지면 초반부터 멘붕이 올거 같아서 아껴마셨다ㅜㅜ.

 

해가 점점 나면서 출발 전 웜업을 위해 발랐던 히팅 크림은 오히려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허벅지에 불이 난 것 같은 느낌..

 

 

 

 

구룡령 정상인 제 1보급소에 도착한 시각 대략 9시 10분. 평속 18km로 안내된 타임 테이블에서는 9시 27분이라 적혀있었고, 출발은 대략 7시 15분쯤 했으니 나쁜 페이스는 아니였다.

 

도로변에 자전거를 집어던지고(살포시 눕혀놓고) 물통을 빼들어 보급소로 달려갔다. 그 자리에서 찬 물 500ml는 족히 마신것 같다.

 

물통을 채우고 허겁지겁 바나나를 먹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보급 쿠폰을 쓰는 줄이 매우 길었다. 어차피 파워젤 같은 보급은 넉넉하개 챙겨왔으니 과감하게 쿠폰 사용은 포기했다.

 

초반부터 물을 많이 마신 탓에 화장실을 들렀다가 20Km가 넘는 구룡령 다운힐을 내려간다.

 

 

이따가 이 긴 다운힐을 다시 올라와야한다니..

내려가도 내려가도 다운힐이 끝이 안 났는데 나중에 스트라바 구간을 보니 다운힐만 25분을 탔다ㅋㅋㅋ.

 

꿀 같은 다운힐은 끝나버리고 다시 팩 찾기에 돌입한다. 하필 역풍이 심하게 몸을 때리던 구간이였는데 구룡령 업힐을 비슷하게 오르며 잠깐 얘기를 나눴던 언니가 앞에 가는게 보여서 뒤에 붙는다. 하지만 그 언니도 바람막이가 필요했을터ㅜㅜ

 

다른 라이더가 나타나자 슉 붙는 속도를 맞추기엔 너무 역부족이였다.

 

결국 고이 보내드리고 지나가는 빨간옷 철인 아저씨 뒤에 붙는다. 철인 기차 역시 짱짱맨. 앞서간 그 언니도 추월해서 조침령 초입까지 죽죽 끌어주셨다.

 

 

이름 모를 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하자 엄청난 경사도의 조침령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매미 같은 수백명의 라이더들을 볼수 있었다.

 

이게 그 조침령(aka 빡침령)이구나.

 

새도 힘들어서 쉬어간다는 조침령은 경사도는 10-15%를 넘나드는데 길이도 4Km나 된다.

 

이럴땐 와리가리를 해야되는데 길 위의 수백명의 사람들과 함께 오르려니 와리가리할 공간이 안 나온다ㅜㅜ 강제로 업힐 트레이닝.

 

초반부터 끌바 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꽤 있었다. 사람이 바글바글했던 초입을 지나 중반에 들어서니 속도차로 인해 빈 공간이 조금은 생겨서 나도 와리가리ㅜㅜ.

 

경사도 높은 업힐은 너무 힘들다.. 바닥에 적힌 키로수를 보면서 꾸역꾸역 밟았다.

 

 

 

물이 너무나 부족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날 폭염주의보였다.

다음 보급소까지 30km는 넘게 가야하는데 벌써 여기서 아까 받아둔 물의 반 이상을 다 마셔버렸다.

아까 더 마실걸, 물통 2개 가져올걸 엄청난 후회를 했다.

 

에어컨 터널이라 불리는 조침령 터널이 보이자 고민이 되었다.

터널 앞에는 더위에 지친 많은 사람들이 널부러져있었다.

 

“나도 여기서 쉴까?”

 

일단 터널은 통과해보자.

 

역시 에어컨 바람을 쐬니 한결 나아진것 같았다. 터널 끝이 다가오고 쉴지 말지 한번 더 고민했다. 그러던 차에 그냥 다운힐을 시작해버렸다. “그래 나중에 정 힘들면 그때 쉬자. 지금은 갈만해.”

 

 

조침령을 내려오고 한창 달리던 중에 이름 모를 낙타등에 서 있던 구급차.

 

열린 트렁크 사이로 보이는 생수!!

저기서 물을 받아가야 해ㅜㅜ

 

본능적으로 멈춰서 물을 받았다.

 

아까처럼 후회하지 않으리, 최대한 많이 물을 마시고 물통도 꽉꽉 채웠다.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 다음 보급지까지는 충분하겠어.

다시 힘을 내서 달렸다.

 

 

 

 

속도 좋은 팩에 흡수되어 신나게 달리고 있는데 팩이 우회전을 하기 시작한다.

 

앞만 보고 쫓아가던 나는 어어?

그제서야 보이는 좌회전/우회전 표시.

 

여기가 어디인지 눈치챘을 때는 이미 한창 코너를 돌고 있을때였다ㅋㅋㅋ.

 

82km 지점에 있는 진동교 삼거리.

여기서 좌회전을 하면 메디오폰도, 우회전을 하면 그란폰도 코스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팩에 탑승했던 모두는 그란폰도를 선택했다.

 

 

제 2보급소에 가기까지 쓰리재와 이름모를 업힐 1개를 더 지나야한다.

 

쓰리재까지 가는 길에 반대편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길을 잘못든 걸까 아니면 그란폰도를 포기하고 메디오를 가는걸까.

어찌됐건 나는 그 사람들과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쓰리재까지 가는 약업힐에 남자들 십수명을 추월했다.

그제서야 약간 마음의 안도감이 들었다.

내 페이스가 영 안 좋은건 아니구나.

 

 

쓰리재는 생각했던것보다 힘들었다.

미니 조침령 같은 느낌이었다.

 

어느 업힐이든 정상엔 항상 쉬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광경이 나를 더 괴롭게했다.

 

“나도 쉴까? 잠깐만 쉬었다 갈까?”

 

하지만 무정차가 얼마나 시간을 단축할수 있는지 여러번 경험했던 터라 이번에도 이를 악물고 바로 내려간다.

 

다운힐 후 바로 나타난 무명업힐.

어디서 많이 본 뒷모습이 보여서 긴가민가했다. 류진오빠였다.

 

하필 업힐 시작점이라 쫓아갈수도 없는데 불러도 뒤를 돌아보지 않네.

옆에 가던 이진형님이 내 목소리를 듣고 대신 불러준다.

 

거의 90km 이상을 혼자 타다보니 길에서 누군가를 만난게 너무나 반가웠지만 하필 업힐..

그들은 점점 멀어져갔다ㅜㅜ.

 

무명 업힐 정상에선 체인이 빠지는 바람에 고치는 동안 무호오빠와 마주쳤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비슷한 시간에 제 2보급소에 도착했다.

 

 

 

 

 

오후 12시 15분.

104km를 홀로 달려 스페셜 보급이 있는 제 2보급소에 도착했다.

 

내가 맡긴 점심거리를 찾고 보급 쿠폰으로 초코파이 2개와 초코에몽을 바꿨다.

해가 중천인데 그늘 자리는 이미 먼저 온 사람들로 가득하고..

할수 없이 그나마 한적한 잔디밭에 앉아 가져온 죽을 먹기 시작했다.

 

내가 스페셜 보급으로 맡긴 것은

죽, 편의점표 황도 절임, 후반부에 먹을 파워젤 5개, 아미노바이탈 4포, MRM BCAA 6알, 근육이완제 2알.

 

진짜 많이도 챙겼다. 입맛이 없었지만 타려면 먹어야 한다.

꾸역꾸역 쑤셔넣고 있는데 익숙한 사람이 지나갔다.  

 

같은 동호회에 있는 97민성이였다.

스페셜 보급도 안 맡겼다길래 초코파이 1개와 황도를 나눠 주었다. 

 

 

 

이어지는 글 : 2017/06/08 - [대회] - 2017 설악 그란폰도 후기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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